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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옛 교육현장 향교와 실명제 축성의 진도읍성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기사입력  2019/04/12 [10:26]

문화재 : 진도향교(전남문화재자료 제127호)/진도읍성(문화재자료 제143호)
소재지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성내리 69

 

삼별초로 잘 알려진 진도는 유무형문화재가 산재한 곳이다. 진도의 시작은 1985년에 개통된 진도대교를 넘어서서 시작된다. 울돌묵 명량해전의 역사적 유적지를 시작으로 삼별초의 용장성과 진도석성, 불교문화의 현장 금골산과 쌍계사, 명승지 운림산방, 교육의 현장 진도향교, 놀이문화의 다시래기, 강강술래 등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한 보물섬이다. 섬 문화재를 하나하나 찾아서 진도의 문화를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새로운 멋이 있다. 먼저 진도의 교육기관이었던 진도향교를 찾는 것을 시작으로 떠나 본다.

 

▲ 진도향교 전경    



진도향교는 진도의 진산 철마산 서쪽의 북산 사이 남쪽으로 뻗어 내린 한 가지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향교에서 남쪽의 읍내를 바라보면 진도군청을 중심으로 진도읍성과 그 앞의 시가지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에 자리한다. 향교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있었던 국립 지방 교육기관이다. 고려 시대를 넘어 조선 시대에 이르러 1392년(태조 1)에 여러 도와 안찰사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써 지방관고과(地方官考課)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학의 쇄신을 꾀하였다. 여기에서 부·목·군·현(府牧郡縣)에 각각 1교씩 설립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 진도향교 표지석    



진도향교는 1438년(세종 10)에 지금의 향현사 부근에 향교를 건립하고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진도만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475년(성종 6)에 지금의 옹외리 동편 오리적 산자락에 옮겨 다시 건립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구의 침입을 받아 소각 위험에 이르자, 당시의 향교장이었던 김희남 등에 의해 오성십철의 위패만 북산의 동굴에 임시 봉안했다. 1623년(인조 1)에 건물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44년 후인 1667년(현종 8)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교 외삼문을 들어서기 전 전학후묘의 향교는 강학 구역과 제례 구역이 토석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외삼문 앞 서쪽 편에는 관제사 등 선정비 13기와 순수 등 선정비 13기가 세워져 있고, 강학구역에 전교 공덕비 6기와 건물 중수 공로비 7기가 세워져 있다.

 

▲ 진도향교 외삼문    



향교와 단군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동쪽 편의 향교 방향으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성균관 진도향교’의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 뒤편에 1970년 4월 27일에 발족한 삼강계의 삼강비가 세워져 있다. 삼강비 뒤로는 선정비가 두 줄로 담장 앞으로 세워져 있다. 외삼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다듬은 돌로 쌓았고 삼도의 구분을 하지 않았다. 외삼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토석담을 쌓고 위에 기와를 얹었다. 외삼문은 솟을삼문으로 사다리꼴의 장대석 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었다. 좌우 칸은 중간 칸에 비해 2/1의 폭으로 낮고 중간 칸은 높으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솟을대문 좌우의 하인방에는 방화벽을 쌓고 상인방은 회벽을 하였다. 토석담은 외삼문 좌우의 앞 기둥에 맞춰 앞으로 내서 쌓고 계단 5칸 째에 좌우로 길게 담을 쌓았다.

 

▲ 진도향교 명륜당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명륜당 건물이 있고 현판이 걸려 있는 칸 방향으로 다듬은 돌로 쌓은 계단을 두고 있다. 건물의 좌우 첫 번째 기둥에는 사리꼴의 장초석을 놓고 나머지는 다듬은 돌로 초석을 두고 그 위에 원기둥을 올렸다. 좌우 첫 번째 칸은 퇴칸에 마루를 두고 띠살문을 각각 두 짝씩 달았고 우측 2번째와 4번째와 5번째 칸에는 판문을 각 두 짝씩 달았다. 명륜당은 중심이 되는 우측 3번째 칸에는 퇴칸에 대청마루를 놓고 4폭의 분합문을 달았고 평방에 명륜당의 현판을 걸었다. 건물의 측면에는 하인방을 방화벽을 쌓고 상인방에는 회벽을 하였다.


명륜당 좌우 쪽에는 동재와 서재를 두었는데,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각 칸마다 띠살문을 각각 2짝씩 달았고, 앞쪽의 우측 측면까지 툇마루를 두었다. 서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2번  째 칸과 5번째 칸은 판문을 달았고, 1,3,4번째 칸은 띠살 창문을 달았다. 동재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流)를 두고 보통 내외 양사로 갈라진다. 내사에 있는 자는 내사생(內舍生)이라 하고, 외사에는 내사생을 뽑기 위한 증랑생(增廣生)을 두었다. 지금은 교직사로 이용되고 있다.

 

▲ 진도향교 대성전    



제례 공간인 대성전은 명륜당 뒤편 높은 곳에 있으며, 솟을 내삼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토석담을 두르고 안쪽에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자리 잡고 있다. 내삼문을 오르는 계단은 반원 형태의 자연석으로 쌓아 계단을 만들고 그 위에 장초석을 놓고 솟을삼문을 마련하였다. 외곽 담장과 연결된 솟을삼문 좌우 벽은 담장과 같이 화방벽으로 하고 상인방은 회벽을 하였다. 삼문 중 좌 우 문은 가운데 문보다 폭이 좁으며 가운데에 태극문을 그렸다.

 

▲ 진도향교 내삼문    



대성전은 비교적 경사가 심한 지형을 3단으로 돌을 쌓고 대성전은 2m 높이의 자연석 축대 위에 조성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전퇴를 두지 않은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양 벽 공면에는 비바람을 막을 풍판을 달았으며 처마는 전면에 겹처마로, 후면은 홑처마로 되어 있다. 정면의 좌우 칸에는 판벽을 하고 가운데에 청판을 단 빗살창문을 달았고, 가운데 칸은 좌우에 판벽을 하고 가운데에 청판을 단 빗살창문 2짝을 달았다. 건물 앞에는 동백나무 3그루가 자라고 있다. 창방과 도리, 평방의 단청은 주문초를 하였으며 화방에는 넝쿨 문양을 그렸다.


대성전 좌우 한단 아래에는 동무와 서무가 자리하고 있으며,  두 건물 모두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을 한 건물로 양 벽 공면에 비바람을 막을 풍판을 달았다. 각 칸에는 회벽을 하고 가운데에 청판을 댄 빗살창문 한 짝씩 달았다.

 

▲ 진도 단군전    



대성전 내에는 5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송조2현(정호, 주희), 우리나라 18현(홍유후 설총, 문창후 최치원, 문성공 안유, 문충공 정몽주, 문경공 김굉필, 문헌공 정여창, 문정공 조광조, 문원공 이언적, 문순공 이황, 문정공 김인후, 문성공 이이, 문간공 성혼, 문원공 김장생, 문열공 조헌, 문경공 김집, 문정공 송시열, 문정공 송준길, 문순공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학전 7결 5결을 지급 받음)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현재는 전교 1명과 잔의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방학 기간에는 학생들에게 충효예절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 진도읍성    



진도향교 아래 진도군청 뒤로 이어진 진도읍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읍성은 세종 22년(1440) 진도고읍성에서 터전을 현재의 진도읍으로 옮기면서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진도읍성으로 옮기는 문제는 세종 때 충청, 전라, 경상도 등 하삼도를 비롯한 함경, 평안도의 읍성 축성을 관장한 영중추원사 최윤덕의 건의로 실행되었다. 진도읍성 이설 배경은 진도고읍성이 진도군의 북동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진도군 전역을 관할하기에는 불편한데 그 이유가 있었다. 또한 현재 진도읍성의 배후에는 천연의 요새인 철마산성이 있어 치소를 옮기는 데 유리하였다. 진도읍성은 진도군의 중심부에 있기 때문에 진도군 전체를 관할하는데 편리하였고, 진도 전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발달하여 치소로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다. 배산임수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어 방어하는 데 유리하다. 이러한 이유로 진도군의 터전을 진도읍으로 옮기게 되는데, 읍성은 이후에 축조하였을 것으로 짐작될 뿐 구체적인 완성기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옥주지>에 의하면 ‘지금 읍성의 기강과 방리의 구분은 모두 옛날의 제도를 따랐는데 세종 22년(1440)에 읍성을 신설한 후 성첩이 옛날의 제도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하여 치소를 옮긴 그해 읍성이 완성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 또한 축성은 실명제를 두었다는 사실이 성돌에 새겨져 있다. 읍성의 남동벽 담당의 성돌에 ‘고흥종(高興終)’, 곡성시(谷城始)‘의 명문과 남벽에 해당하는 담장의 성돌에도 ’장흥부‘라고 새겨진 명문이 있어 곡성, 고흥, 장흥 등 군현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축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 진도읍성 치성    



지금의 읍성을 둘러보면 지적도상에는 치가 16개이나 현존하는 치는 5개소뿐이고, 수구는 1개소로 남벽 중앙에 설치되어 있다. 속칭 ’큰샘거리‘라고 부르는 곳에 현재는 유구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성안의 지형이 높고 성 바깥쪽이 낮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수구의 형식은 개거식으로 추정되고, 해자는 인공 해자와 자연 해자로 나누어진다. 인공 해자는 읍성 북벽의 첫 번째 치와 두 번째 치 사이에 길이 약 63m, 폭 10m 규모이며 성벽으로부터 약 15m 외곽에 있다. 자연 해자는 북산으로부터 발원한 냇물이 북벽 첫 번째 치에서 인공 해자와 서로 합류하여 서벽을 경유 남천으로 유입되는 순천내골과 읍성의 남쪽을 흐르고 있는 남천이 있다. <옥주지>에 의하면 연못이 2개소로 기록되어 있는데, 배회정 동쪽의 아정에 1개소와 성 동쪽에 1개소가 있다고 하였다.


건물지는 가운데 위치가 확인되는 공아, 내아, 객사 등 4개소이며, <진도부읍지도>에 나타난 건물지를 참조해보면 부사, 장청, 사령청, 군뢰청, 작청 등의 관아건물은 현 진도초등학교에 위치한다. 객관의 동쪽 동중, 동하리의 화약고, 군기고, 휼청, 민고, 훈도청, 육장청 등 전쟁물자와 대민구휼창고가 위치하였다. 누정지인 망해루는 현 J.C밭에 위치하고 객관의 외문루인 주변루는 성내리 75번지, 조종루는 성내리 54번지, 연정은 진도초등학교 뒤편의 성내리 4-1번지에 있었음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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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4/12 [10:26]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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